강물처럼 이어지는 생명의 노래: 불교가 바라본 삶과 죽음
강물처럼 이어지는 생명의 노래: 불교가 바라본 삶과 죽음
가을 낙엽 속에 숨은 비밀
교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노란 빛줄기가 교과서 위를 스쳤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 입자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작은 먼지도 언젠가 사라질 텐데, 왜 이리도 아름다울까?' 그 순간,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며 흐르고 변하는 강물 같은 이치. 가을 낙엽이 땅에 떨어져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죽음도 끝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는 것을.
철학자의 손길
석가모니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그의 말씀은 마치 강물이 돌을 갈아내듯, 우리의 상식에 새겨지는 각인처럼 다가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친구에게, 시험 결과에 절망하는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너의 오늘은 내일을 잉태하고 있어'라고.
삶을 엮는 다섯 개의 실
레고 블록 같은 인간의 구성
불교에서는 사람을 다섯 가지 요소(오온)의 조합으로 본다. 육체(色)는 흙과 물로 만들어진 도자기요, 기쁨과 슬픔(受)은 파도처럼 오가는 바다. 추억(想)은 구름처럼 생겼다 사라지고, 의지(行)는 강물의 흐름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의식(識)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다. 시험지 앞에서 떨리는 손, 체육대회 때 뛰던 심장소리 모두 이 다섯 실타래가 엮어내는 순간들이다. 교과서에 적힌 '오온'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림자 속의 빛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구절은 교실 벽에 걸린 현수막처럼 익숙했다. "형체가 공함이요 공이 곧 형체라"는 이 말씀을, 어느 날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이해했다. 유리창 속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니면 빛의 장난일 뿐일까? 이렇게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 연극이지만, 동시에 그 빛의 춤사위가 우리의 전부다. 공부 스트레스, 친구와의 다툼, 부모님의 잔소리 모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가는 것뿐이라니.
미래를 짓는 오늘의 발걸음
업(業)이라는 씨앗
누나가 대입 원서를 쓰던 날,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결과보다 네가 뿌린 씨를 봐라." 그때는 몰랐다. 매일 아침 줄넘기 100개를 하던 친구가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것,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은 친구의 눈빛이 모두 내가 뿌린 씨앗의 싹이었다는 것을. 불교의 업(業) 사상은 마치 시간 여행의 법칙 같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든 작품이고, 미래의 나는 오늘의 선택으로 조각된다.
강물은 흐르되
겨울방학 때 할머니 댁 연못가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 그 위에 앉은 새들의 발자국. 생명은 형태를 바꿔가며 영원히 흐른다. 죽음이란 단지 옷을 갈아입는 순간일 뿐이라니. 시험 끝나면 버리는 문제집처럼 우리의 육체도 때가 되면 놓아버리는 것.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지식과 경험은 새로운 몸에 스며들어,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날 꽃봉오리가 되리라.
## 에필로그: 수학여행 버스에서
친구들이 잠든 새벽, 창밖을 스치는 별빛을 보았다. 138억 년 전 빛이 지금 내 눈동자에 닿다니. 이 순간도 수많은 인연의 결합체인 걸. 핸드폰에 저장된 추억 사진 속 웃는 얼굴들, 시험기간 함께 나눈 삼각김밥, 모두가 나를 이루는 오온의 조각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연결의 고리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또 다른 인연의 실타래가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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