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로 읽는 죽음앞에선 삶
하이데거로 읽는 죽음앞에선 삶
철학자의 말에 담긴 삶의 무게
어느 가을 저녁, 창가에 기대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왜 이리도 두려운 것일까?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5](#).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교실 창문에 비친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린다는 깨달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삶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그의 주장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았다.
철학책 속에 숨은 일상의 진리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친 『존재와 시간』은 나에게 철학적 각성을 선물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간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을 때, 문득 어제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수능 끝나면 진짜 인생 시작이야"라고 말하던 그 친구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어두워 보였던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본다면, 오늘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죽음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하이데거의 통찰은 우리 교실 안에서도 유효했다.
죽음이 가르쳐주는 삶의 기술
비본래적 삶 - 남의 시선에 갇힌 우리
매일 아침 SNS를 열면 완벽해 보이는 친구들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Das Man)의 획일화된 삶"은 바로 이 모습이다. 수학여행 사진을 올리며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캡션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바쁜 일정에 지쳐 있던 친구. 그가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웃는 모습에서 나는 죽음을 외면하며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았다. 죽음을 잊은 채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사는 삶은 마치 유리병에 갇힌 나비와 같다. 아름다운 날갯짓을 보이려 애쓰지만 정작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여정
지난해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을 때의 경험이 문득 생각난다. 병상에서 할머니는 유언 대신 평생 간직했던 수필집을 건넸다. 그 속에 적힌 "행복은 오늘의 무사함에 있다" 문장이 할머니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하이데거가 말한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죽음을 의식하며 매순간을 진심으로 살아낸 이의 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죽음
최근 한 동아리 친구가 게임 속 캐릭터 장례식을 올린 적이 있다. 가상세계의 죽음이라 조소했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에서 21세기식 실존적 고민을 발견했다. 하이데거의 시대에는 없던 "디지털 유령(digital ghost)" 현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인스타그램에 남겨진 흔적들이 사후에도 추억으로 남는 이 시대, 죽음의 개념은 물리적 종말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이는 마치 강물이 돌을 갈아내듯 우리의 인생관을 새롭게 조각하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삶을 위한 죽음의 연습
어제 교과서 여백에 적어둔 문장이 생각난다."죽음을 생각하면 비로소 삶이 빛난다". 이제는 매일 아침 알람을 끌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라는 질문이 나를 더 담대하게 만든다. 수학 문제를 풀다 지칠 때면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명상한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의 붕괴'를 체험하는 것 같다.
시작과 끝을 잇는 철학의 다리
방과 후 운동장을 걷노라면 발밑에 놓인 돌멩이들이 하이데거의 사유로 보인다. 각자 제 모양을 간직한 채 제자리를 지키는 이 돌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 존재의 본질을 말해주는 듯하다. 철학 수업 시간에 배운 '실존적 진실성(authenticity)'의 개념이 이제는 교복 주머니 속에 들어온 편지지처럼 느껴진다. 죽음이 주는 교훈을 가방에 넣고, 나는 오늘도 학교 정문을 들어선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더욱 소중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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