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창가에 부는 가을바람: 죽음의 의료화를 돌아보며
병원 창가에 부는 가을바람: 죽음의 의료화를 돌아보며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고등학교 2학년 가을,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 창가에서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한 달 더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 인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 말씀을 들으며, 첨단 의료기기가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모습에서 '존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처음 느꼈다.
시간을 팔고 존엄을 사는 사회
21세기 병원은 죽음을 '적'으로 삼는 전쟁터다. 인공호흡기 삐걱거리는 소리, 심전도 모니터의 삐 소리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잊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75%가 병원에서 눈을 감지만 그중 상당수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생명 연장 치료를 받는다. 마치 시계 태엽을 감듯 의료기기가 인간의 시간을 강제로 돌리는 이 시대, 우리는 진정 누구를 위해 숨을 쉬고 있는 걸까?
기술의 그늘에 가린 인간의 얼굴
로봇 팔에 매달린 생명
중환자실 유리문 너머로 본 한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온몸에 달린 튜브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그를 옥죄고 있었다. 의학이 '살리기'에서 '죽이기'로 전락한 순간이다. 2025년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가 240만 명을 넘었다는 보도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려 함을 보여준다. 이 서류 한 장은 병원의 철제 침대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최후의 항거다.
호스피스 병동의 티타임
"차 한잔 하실래요?" 서울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김 할머니의 말이다. 그녀는 말기 암으로 입원했지만 매일 오후 3시면 차를 우려내며 손주들에게 전화를 건다. 1967년 영국에서 시작된 현대 호스피스 운동의 정신이 여기서 꽃피고 있었다. 통증 관리 약물 대신 따뜻한 대화로 마음을 치료하는 이 공간은, 의료화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아름다운 반란이다.
디지털 시대의 유서 쓰기
최근 동아리 친구가 SNS에 올린 글이 화제다. "내가 만약 교통사고를 당하면 장기기증 부탁해"라는 내용. 19세 소년이 스마트폰으로 작성한 이 메시지는 사실 디지털 시대의 사전의료지시서다. 법원 판례에 따라 2023년부터 모바일 유언이 공식 인정되면서, Z세대는 생의 마지막 선택까지도 온라인에 기록한다.
첫사랑처럼 소중한 마지막 순간
학교 운동장에서 배운 것
어제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 문득 생각했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왜 그렇게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자신의 페이스로 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2025년 현재 15.5%의 말기암 환자가 직접 치료 방식을 선택한다는 통계는, 인생의 마지막 주자를 위한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을밤의 별자리처럼
병원 옥상에 올라 별을 보던 날,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의료기술은 별을 따는 게 아니에요.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등불이어야죠." 할아버지가 떠나신 지 1년,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 같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빼앗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이 가을, 학교 도서관에서 『존재와 시간』을 펼치며 깨닫는다. 하이데거가 말한 '진정한 존재'가 되려면, 첫사랑을 만드는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병원 침대에서도, 집 안방에서도, 나다운 모습으로 인생의 문을 닫을 권리 - 그것이 21세기가 우리에게 준 가장 소중한 숙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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