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에서 온 편지: 본회퍼가 내 영혼에 새긴 값비싼 은혜
✉️ 감옥에서 온 편지: 본회퍼가 내 영혼에 새긴 값비싼 은혜
2017년,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 도서관 지하 서고. 박사 논문 자료를 찾던 중, 먼지 쌓인 독일어 원서 한 권이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자도의 대가(Nachfolge)』, 디트리히 본회퍼. 호기심에 책을 펼쳤을 때, 마르코복음 8장 3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에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장의 편지가 책장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본회퍼가 나치 감옥에서 쓴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없이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다르다."
그 한 문장은 제 안의 종교적 틀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본회퍼는 단순히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복음을 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저를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끌었습니다.
1. 💎 첫 번째 빛: 값비싼 은혜 (Kostbare Gnade)
본회퍼는 경고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죄를 용서하되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교회의 독이다."
목회자로서 저는 교인들이 매주 반복적으로 고백하는 죄—음주, 폭력, 심지어 성범죄—앞에서 무기력함을 느꼈습니다. '용서만이 복음일까?'라는 의문이 떠오를 때, 본회퍼의 목소리가 감옥 철창을 뚫고 제게 다가왔습니다.
"값비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며, 제자도를 명하고, 생명을 바꾸는 복음이다."
그의 말은 제가 피해자의 집 앞에서 쥐었던 주먹을 풀게 만들었습니다. 은혜는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정의로 빚어진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은혜는 무료 선물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빈 손으로 십자가를 잡는 용기의 대가다.
2. 🌍 두 번째 길: 어른이 된 세상 (Mündige Welt)
본회퍼는 선언했습니다.
"종교 없는 시대에 하나님은 고아처럼 교회에 갇혀서는 안 된다."
대학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기도했는데도 F를 받았어요"라고 투덜댔습니다. 저는 당황했지만, 본회퍼의 목소리가 칠판 위에 글씨를 새기는 듯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 해결사가 아니다. 그는 세상 한가운데서 고통당하시는 분이다."
그날 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초자연적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것이 성육신의 연장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성당의 제단 위에서, 사제의 예복 속에서 죽어가신 것이 아니라,
강제 노동 수용소의 굶주린 얼굴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셨다.
3. 💔 세 번째 대화: 고통받는 하나님 (Leidender Gott)
"십자가 위의 하나님은 무력한가?"
본회퍼는 이 혁명적 질문으로 저를 흔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로 제 이름을 잊었을 때, 저는 "하나님이 왜 방관하시나요?"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때 본회퍼의 편지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고통 속으로 함께 들어오신다."
병원 침대에서 할머니가 제 손을 꼭 쥐며 웃던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전능함이 아니라 연약함 속에서 빛난다는 것을.
신성은 전능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선택한 무기력함 속에 빛나는 것.
우리가 주저앉을 때 그 곁에 무릎 꿇는 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4. ⚔️ 네 번째 깨달음: 저항의 제자도 (Widerstands-Nachfolge)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체제와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행동이다."
재벌 총장의 불법 증여 사건이 터졌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화해를 위해" 침묵했습니다. 저는 분노했지만, 본회퍼의 교수형 밧줄이 제 목에 메아리쳤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야 한다."
다음날, 저는 검찰에 증거 USB를 제출했습니다. 그 안에는 '침묵하는 교회를 향한 신학적 폭탄'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단은 찬양으로 채워지는 무대가 아니라 불의를 태우는 화로여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권력자의 등을 데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5. 🏘️ 다섯 번째 비전: 비종교적 기독교 (Religionloses Christentum)
본회퍼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교회 건물이 무너져도, 예수 안에서 사는 공동체는 살아남을 것이다."
코로나19로 텅 빈 성전을 바라보며 절망하던 때,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ZOOM 예배 중 한 노신사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야 깨달았어요. 교회는 벽돌이 아니라, 제가 치매 아내의 발을 닦아드릴 때입니다."
그 순간, 저는 천장에서 본회퍼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종교의 허상을 깨부수는 그의 목소리였습니다.
신앙은 의식(儀式)이 아니라 이웃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상의 저항이다.
주방 조리대 위의 감자 씻는 물소리가 가장 거룩한 찬송가다.
본회퍼를 안고: 일상의 성역을 세우다
이제 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행동에서도 본회퍼의 가르침을 봅니다.
값비싼 은혜: 야간 수당을 포기하고 독거노인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선택.
어른 된 신앙: "신이 계시냐?"는 손님의 질문에 "제가 답해드리겠습니다"라며 커피를 건네는 행동.
저항의 제자도: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쓰레기통에서 꺼내 허리를 굽혀 전달하는 모습.
본회퍼가 제게 준 최고의 선물은 '종교를 인간의 현실로 끌어내리고, 일상을 신성한 저항으로 승화시키는 혜안'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끓는 라면 그릇에서 성찬식의 깊이가,
지하철에서 밀리는 몸부림 속에서 십자가의 고통이,
월급날 송금 버튼을 누를 때 헌금의 참뜻이 살아 숨 쉽니다.
이것이 본회퍼가 증언한 가장 위험한 복음입니다.
교도소 운동장의 새장 그림자 아래, 그의 마지막 편지를 품으며 저는 여전히 그의 질문을 되새깁니다.
"네가 마주한 이 불의는 기도실 문을 닫고 피할 수 있는 유혹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뛰어들어야 할 전장인가?"
답은 침묵하는 순간 이미 배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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